거북이는 안정적이고 화목한 가정에서 첫째로 태어났다.
부모님은 두 분 다 학교 교사셨고, 심지어 할아버지마저 학교 교감선생님이셨다.
그런 거북이는 유년시절부터 주변에는 늘 '선생님 첫째 딸'이라는 프레임에 갇혀 있었다.
어린이집 원장 선생님은 아버지와 같은 학교 선생님의 아내분이셨고,
초등학교, 중학교 담임선생님은 대부분 부모님의 선후배 관계이셨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나는 '선생님 딸' 이미지를 주변인들에게 보이려고 노력했다.
공부, 예의, 사회성 등 '올바른' 모습을 보이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물론 시험을 잘 보면 스스로 뿌듯함을 얻는 것도 있지만,
부모님과 주변인에게 '인정'과 '칭찬'을 받고 싶은 게 우선이었다.
성인이 되서야 고친 안 좋은 버릇이 있는데, 바로 문제집 채점할 때 틀린 답임에도 맞았다고 표시하는 것이다.
부모님이 문제집을 검사하시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스스로 잘하겠지라는 신뢰를 갖고 계셨다.
하지만 나는 내 방에서 자습을 할 때마다 한 번쯤은 틀린 답 옆에 동그라미를 그렸다.
당시 전교 1등을 할 정도로 나는 공부를 못하진 않았다.
하지만 오답이 너무 많아 보이면, 부모님이 실망할까봐 난 오답을 정답으로 속였다.
거짓 동그라미가 많아 질수록 당연히 내 마음은 편치 않았다.
왜냐면 지금은 아무도 모르는 나의 오점이지만, 언젠간 내가 이것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지금 정답으로 속인 저 지식들은 내 머릿속에 남지 않겠구나"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고등학교 때는 처음 집을 떠나 학교 기숙사에서 생활했다.
공부를 잘하는 친구들이 모인 특목고에서 나 자신에 대해 많이 실망했다.
노력했음에도 친구들보다 뒤쳐지는 성적과 함께 나는 자신감이 많이 떨어졌다.
실망하시는 부모님을 보니 내 마음은 더욱 지옥과도 같았다.
지금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특목고가 아닌 일반고에 진학했을 듯하다.
학창 시절은 계속해서 '완벽하지 못한 나 자신'에 많이 자책하고 미워했다.
성인이 되고 대학생이 되면서 나는 조급했다.
누구보다 잘 되어야 한다는 압박감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던 것 같다.
이와 더불어 딸이 잘 사회에서 뿌리 잡길 바라는 부모님의 마음에 나는 '취업'이라는 고민이 컸다.
그래서 그랬을까,
대기업 인턴에서 정규직으로 전환했을 때, 나는 기쁘면서도 '아직 아니야'라고 생각했다.
바로 다른 대기업 공채 신입사원으로 입사했지만, 나는 이들보다도 잘되고 싶었다.
대학원에 들어갔다. 그 안에서도 동기들보다 공부를 더 잘하고 취업을 잘해서 '수석'이란 이미지를 주고 싶었다.
그래서 차석으로 졸업했음에도 아쉬움이 너무나 컸다.
지금 이직한 회사에서 이전 회사 동기들 대비 높은 직급과 연봉에도 나는 불만족스럽다.
지금 이순간을 만족하는 순간, '남들과 똑같아진다'라는 두려움이 크다.
커리어만의 문제가 아니다.
독립생활을 하면서 겪은 다양한 상처와 고난들이 있음에도 나는 부모님께 말을 꺼내는 게 너무나 어렵다.
하다 못해 김치, 참기름, 고추장 등 엄마에게 달라고 하는 말이 입에서 내뱉는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
'선생님 첫째 딸'의 프레임에 혼자 사로잡혀 '알아서 스스로 하는', '똑 부러진', '걱정 하나 없는', '자랑스러운' 딸이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랬을까, 내 속마음은 깊게는 안 보여 드렸던 것 같다.
항상 '이번에 승진했어', '이번에 내가 뭘 잘했어' 등 항상 칭찬받기 위한 일들만 부모님께 이야기했었다.
정작 프레임에 갇혀 나약하고 때로는 한없이 우울한 나의 마음을 알리지 못했다.
그렇다고 지금 당장 표현하라고 하면 할 수 있을까? 아니 못한다.
내가 말하는 순간 부모님은 너무나 걱정하실 테니깐, 실망하실 테니깐.
실제 내 모습이 어떤지 부모님은 모르실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나는 장녀이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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